타르코프스키 [1332076] · MS 2024 (수정됨) · 쪽지

2024-09-01 09: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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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양은 자기위안과 양립할 수 있을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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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서 칼럼 쓰는 타르코프스키입니다

곱씹어볼수록 흥미로운 논쟁이라서 의견을 남겨보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이런 고민이 현장에서 불가능하므로 쓸모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제 수능 기출에도 선지가 반드시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직접 느껴보는 건 필수적입니다.


논란의 쟁점이 많지만, 핵심 질문은 <겸양이 자기위안과 양립할 수 있는가>입니다. 

결론은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화암구곡에서 겸양녕하세요 독서 칼럼 쓰는 타르코프스키입니다


곱씹어볼수록 흥미로운 논쟁이라서 의견을 남겨보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이런 고민이 현장에서 불가능하므로 쓸모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제 수능 기출에도 선지가 반드시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직접 느껴보는 건 필수적입니다.


논란의 쟁점이 많지만, 핵심 질문은 <겸양이 자기위안과 양립할 수 있는가>입니다. 

결론은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화암구곡에서 겸양의 태도가 드러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허용 가능)

"겸양은 단순히 낮추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낮은 처지에서 비하적인 표현을 쓰더라도 겸양이 될 수 있다"

"겸양은 실제로는 높은데 표현만 낮춰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낮은 처지에서 비하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겸양이 될 수 없다"


제가 보기에 두 견해에는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 위안'과 '자기 비하(자포자기)'는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인간으로 태어나서 친구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나는 쓰레기다. 이대로 비참하게 살다가 죽겠지"라는 표현에서 겸양의 태도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화암구곡의 화자는 자기를 비하한다기 보다는 자기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회포뿐만 아니라 자족감과 긍지까지 동시에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묘한 심리 때문에 선지 판단이 어려워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유행하는 말로 '오히려 좋아', '럭키비키', '정신승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비슷한 이중적 감정을 느껴본 적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심리학 등에서 활용되는 '조하리의 창'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와 타인이 평가하는 나와, 타인이 알지 못하지만 나만 아는 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양이라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높고 낮음 사이의 격차를 전제하는 태도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암구곡에서 화자는 내면에 있어서 언젠가 출사에 성공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느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그를 어떻게 보든지 간에, 이미 야인 생애로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고 있더라도,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있는 화자 스스로는 여전히 겸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랑스러움은 틀린 걸까요? 자랑스러움은 자족감과 긍지와 다른 것일까요? 매우 애매합니다. 자신감과 자존감, 자부심, 자족감, 자긍심이 미묘하게 유사하면서도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2025학년도 LEET 추리논증 27번에서, '동정심'과 '미안한 마음'이 같은 것인지, 혹은 최소한 유사한 것인지에 관해 출제 오류 논란이 있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결론적으로 출제기관은 둘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판단함).

 긍지(=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가지는 당당함)와 자랑스러움(=남에게 드러내어 뽐낼 만한 데가 있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수험생은 이러한 차이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떄로는 비슷한 거니 퉁치고 넘어가되, 때로는 예리하게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합니다. 화암구곡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랑스러움'의 감정이 드러났느냐? 라고 묻는다면 결국 1수에서의 긍지가 자랑스러움과 동치될 수 있는지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보기>와 1수만 보면, 화훼에 대한 긍지가 자랑스러움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이 자랑스러움이 단순한 내적인 기쁨에 머무는지, 아니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감정인지는 1수만 봐서는 명확히 구별하기 어렵습니다만, 어느 경우이든 긍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산에서의 삶"(9수)에서 자랑스러움을 느끼냐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화훼에서 긍지를 느끼는 것과, 청산에서의 삶에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두 가지 간극이 있습니다. 하나는 긍지와 자랑스러움 사이에 있고, 다른 하나는 '화훼를 가꾼 행위'와 '청산에서의 삶' 사이에 있습니다. 화훼를 가꾼 행위가 청산에서의 삶에 포함되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청산에서의 삶을 종합적으로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9수에 나오는 '자랑'은 명백히 대외적인 자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지금은 대외적으로 자랑할 수 없지만 미래에만 자랑할 수 있다고 여길까요? 그건 명확히 드러나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나중에는 출사에 성공해서 무용담처럼 자랑할 수 있겠다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제가 중요합니다. 여자친구를 사랑하십니까? 누군가 굳이 "사랑했죠", "사랑할 날 있겠죠"라고 답한다면 당연히 현재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대해석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오묘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화훼에 긍지를 느끼는 건 맞지만, '야인 생애'(청산에서의 삶)라는 말이 현재의 자랑스러움을 표현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자랑스러움과 겸양은 논리적으로 불일치하기 때문에 절대로 답이 될 수 없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자부심을 외적인 비하표현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기 떄문입니다. 여기서 4번 선지가 틀린 이유는, 화자가 청산에서의 삶 자체를 현재로서는 외부에 자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9수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1수, 6수, 9수를 종합해 보면, 화훼에 대해 이미 느끼는 감정은 긍지(자랑스러움)이 맞지만 이는 내적인 범위로 한정됩니다. 진정으로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포인트는 야인 생애, 즉 힘든 시기를 겪었다는 것인데, 이는 야인으로서는 결코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고, 먼 훗날에 비로소 


 어떤 가수 지망생이 군대에 갔는데 운이 나빠서 최전방에 끌려간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자발적으로 끌려간 게 아니고, 가수로서 무대에 설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회포를 분명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골을 넣으면 자족과 긍지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군바리'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여전히 겸양의 태도가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힘든 군생활을 겪었고 그 중에 골도 많이 넣었다는 사실을 언젠가 자랑할 일이 있을거라며 자기 위안을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멍석을 깔아주고 남들에게 자랑해보라고 하면 자랑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자랑은, 자기가 가수로 성공하고 나서, "하하 제가 이런 어려운 시기도 다 겪어봤습니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자랑할 성질의 것이고, 지금 당장 떠벌리기에는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이라고 스스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골은 분명 긍지를 느끼는 원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대에서의 삶'에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표현하는 것은 비약이 될 것입니다. paraphrase에서 중요한 것은, 부분과 전체, 개연과 필연 등을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골 넣는게 기쁘니까, 앞으로도 군대에 계속 있을래?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암구곡에 나오는 정서는 소년점프라는 노래에 "계획대로 되고 있어"라는 가사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 대해서는 종합적으로 부정적인 태도이지만, 그 중 일부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고, 현재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에는 반드시 탈출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탈출한 후에는 그 부정적인 현실이 오히려 남들에게도 자랑할 만한 것이 되는 역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훼에서 긍지를 느끼는 것과 청산에서의 삶에 회포를 느끼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양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모국어화자이지만 이 문제를 자세히 보기 전에는 긍지와 자랑스러움 사이에 미묘한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학습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p.s. 위와 비슷한 사례로, "재능"이라는 어휘에 대한 오개념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흔히 재능 vs. 노력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어서 마치 재능이 선천적인 소질만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재능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가원에서 이런 부분을 출제 아이디어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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