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1989 (1)+(2)
저희 애가 운좋게 올해 바라던 대학에 합격을 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 수험생 부모 노릇도 끝이 났습니다.
수험생 부모가 되고 보니 저 학교 다닐 때에 비해 엄청나게 바뀐 제도와 분위기에 낯설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하더군요.
맘 졸이는 시기도 끝나고 마음이 느긋해져 괜히 쓸 데 없는 글 한번 남깁니다.
개인적 기억에 기반한 내용이라 약간의 오류는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서울대 사회과학대 90학번으로 89년에 학력고사를 봤습니다. 왠지 밝혀야 신빙성이 있을 거 같애서 ㅎㅎ;;)
1.
본인 때는 110만명이 학력고사를 봤다 하고(역대 최다지 싶음) 서울대 정원이 4,000명대 초반이었음 -> 서울대 갈 확률 0.4%.
최근 수능 응시생 40만명 중반에 서울대 3,000명대 + 증원되기 전 의대정원 3,000여명 -> 의대나 서울대 갈 수 있는 확률 약 1.5%.
이렇게 보면 최고 명문대학을 갈 확률이 수치상으로는 옛날이 훨씬 빡셌던 건 사실이지만, 다만 지금 수험생들이 훨씬 더 혹독하게 고생하는 것 같음.
솔직히 요즘 친구들 보면 마음이 아픔… (물론 우리 때도 나름대로 죽어라 공부하긴 했지만)
2.
그 시절에는 의대라고 해서 무조건 명문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위의 89년 확률 계산에서 의대는 제외했음. 그 때 지방대 의대의 최저 커트라인은 서울대 농대보다 낮았고, 서울 공대보다 높은 의대도 서울대 의대 밖에 없었음. 당시 의대는 그냥 해당 대학의 최높공 수준이었다고 보면 됨.
3.
당시 커트라인 전체 1등은 서울대 물리, 전자공학, 제어계측 등이 찍었음. 그리고 내 후배 때는 컴퓨터 공학과가 1등 찍었다고 들었음. 서울대 의대는 최상위 라인이긴 했으나 1등의 느낌은 아니었음. (근데 제어계측이 도대체 머하는 데인데, 매년 1등을 찍는지 궁금했었음. 지금도 모름)
4.
당시는 본인이 지원한 학교에 가서 같은 과에 지원한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시험 봤음. 즉 시험 볼 땐 옆엣 놈이 직접 경쟁자, 붙게 되면 과친구였음. 또 자기가 지망한 대학 내에서 1, 2, 3지망으로 3개의 과를 지원할 수가 있었음. 1지망 떨어져도 2지망, 3지망 과에 붙을 가능성도 있었음. 예를 들어 내 고등학교 1년 선배는 1지망인 서울대 공대에 떨어지고, 2지망으로 쓴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음. 머 그런 시절이었음…
5.
당시엔 입학제도가 전기 후기로 나뉘어서 전기 대학에 떨어진 학생들 중 n수 하기 싫은 학생들은 후기 학력고사를 다시 쳐서 후기 대학에 갈 수 있었음. 후기에는 성균관대, 한양대가 최고 학교였는데 서울대 떨어진 학생들이 몰려서 특히 후기 성균관대 법대의 퀄리티는 연고대 쌈싸먹었음.
6.
옛날 수의사는 딱히 인기직종이 아니었음. 그래서 서울대 수의대 커트라인이 서울대 농대와 비슷한 수준이었음. 특히 서울대의 경우 수의과 캠퍼스가 농대랑 같이 수원에 별도로 있었는데, 여러모로 수의대는 메디컬보다 농대라는 느낌이 강했음. 유사사례로 요즘은 농경제도 경제 계열로 보아 강세인 거 같은데, 그 땐 ‘농’경제로 봤기 때문에 그냥 농대 중 하나로 간주되었음.
7.
요즘은 간간히 수능 만점자가 나오는데, 학력고사 시절에는 10년이 넘는 동안 단 한명의 만점자도 없었음. 340점 만점에 320점 초반이 수석인 경우도 있었고, 아주 드물게 만점 근처에 간 사람은 있어도 만점은 없었음.
과목 수는 대충 10개 정도 됐고, 문과도 과학시험을 치고, 이과도 사회시험을 보았음. 또 필기시험 320점에 체력장 20점을 더해서 340점이 되는데, 사전에 학교에서 체력검사를 해서 점수를 부여했음. (체력장은 대부분 만점이었다고 기억함.)
8.
당시엔 지거국과 사범대가 엄청난 강세였음. 시골 부모님들은 서울대 못 갈 거면 경북대를 가야지 어디 연대나 고대 같은 듣보잡을 가냐?라고 하시던 시절임.(실제 사례이긴 한데 일반적으로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런 생각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다소 극단적인 예임)
또 우리 선배들은 국립대 사범대에 입학하면 학비전액 무료, 공립학교 교사 채용 등의 파격적 혜택이 있어서 머리 좋고 형편 어려운 학생들은 사범대로 몰렸고, 그래서 커트라인이 어마 무시하게 높았음. 그 혜택이 폐지된 후에도 사범대 강세는 한동안 지속되었음.
역시 교육에 진심인 나라…
9.
당시 수도권에선 서성한외까지가 명문대의 느낌이 났음.(개인적인 느낌임) 서강대는 학생수는 적지만 고등학교만큼 빡세게 공부를 시킨다는 점에서 졸업생들의 퀄리티가 인정을 받았음.
성대, 한양대는 앞에서 말했듯이 후기대 버프를 씨게 받았는데, 특히 법대와 한양대 공대가 명문으로 알아줬음.
지금은 중경외시 라인으로 밀렸지만 당시 외대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외국어 특화라는 장점으로 꽤 잘 나갔음.
10.
당시에는 선지원이라 아무리 학력고사 점수가 잘 나와도 본인이 지원한 학교 이외에는 갈 수가 없었음. 본인도 학력고사 때 운좋게 점수가 잘 나와 문과 최상위인 법대 커트라인까지 넘겼지만, 원래 지원한 과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
그 때 담임선생님이 더 높은 과에 지원서를 안(?) 써주셨던 것에 굉장히 미안해 하셨었는데, 내 입장에선 어차피 실력 대로 원서를 썼다고 생각해서 딱히 아쉬움은 없었음. 어차피 그 점수로 성적 장학금도 못 받았는데, 딱히 억울할 것도 없었음.
비슷한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윤O영 선생 어록 중에 “수시납치는 무슨? 수능뽀록이지” 라는 명언이 있음. 애초에 정시로 거기 갈 자신이 없어 수시로 써놓고, 뽀록으로 수능좀 잘 나왔다고 납치니 억울하니 난리를 칠 필요 없다는 말씀임. 내가 커트라인에 딱 맞춰서 문 닫고 들어가기를 바라면 그건 도둑놈 심보 아닌가...
11.
여대의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음. 이대 커트라인은 당시 서강대에 맞먹는 수준이었고, 명실상부 최고 명문여대로 꼽혔음. 또한 숙명여대는 대한제국 황실이 지원해 설립한 학교라고 해서 이대 다음의 명문여대로 꼽혔음. 특히 숙대는 서울지역보다 지방에서 명망이 높아서 지방의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이 많이 입학했음.
암튼 여대 선호도가 꽤 있어서 다른 여대들도 꽤 인기가 있었음.
12.
당시에는 3수가 마지노선이었음. 3수 자체도 드물었고, 그 이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음. 다만 서울대가 특히 재수 비중이 높았던 것 같음.
지금은 n수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꿈을 쫓기 위해 젊은 날의 몇 년을 희생한다 라고 하면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 꿈이 너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 (물론 학생들 탓을 할 순 없다고 생각함)
13.
친했던 친구 놈이 있는데, 공부에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니었음. 전기대 탈락, 후기대 탈락, 전문대 탈락으로 3연속 광탈함. 멀 해야 하지 하다 큰 고민 없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해 버림. (시험 과목이 학력고사 과목이랑 거의 일치했다고 함.) 그 후 공무원 위상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지만, 어쨌든 35년째 공무원 생활 중…
14.
1990년 학력고사 수학과목이 역대급 난이도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 때가 워낙 빡세서 가려져 버렸지만 우리 때(89년) 수학도 상당한 난이도였음.
시험지 받고 어어어… 하면서 거의 문제를 못 푼 상태로 두세 장이 확 넘어가 버리니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함. 다행히 어찌어찌 정신줄 부여잡고 버티니 막판에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함. 가까스로 최악은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몇 개를 찍었고, 수학 시험 끝나고 점심을 먹는데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던 기억이 남. 암튼 힘겹게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시험을 마쳤더니 오히려 평소보다 점수가 잘 나왔음.
여러분 X망한 것 같아도 당장 포기/리셋할 생각 절대 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세요.(그게 모의고사든 수능이든 내신이든 현역시절 자체든) 특히 현역으로는 이미 망한 거 같으니 올해는 포기하고 재수 때 열심히 해야지 이러는 순간 넌 재수도 망한 거임. 재수를 할 때 하더라도 바로 지금부터 각 잡고 시작해야 그나마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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