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란 [887441] · MS 2019 · 쪽지

2023-09-14 16: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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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2022학년도 문과논술 풀이과정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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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가들이 주장하길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우리의 재능과 고통스러운 노동이 바로 그 성장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말이다. 그러나 그 언제까지가 언제까지일까? 왜 그들은 (건방지게도) 우리의 재능을 우리의 운명으로 상정하여 결정하는가. 그리고 왜 그로부터 나오는 보상에 우리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가정(상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이러저러한 ‘나의 재능’ 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행운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일 나의 이익에 상응하는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불운 탓이다. 공훈에 가치를 두어 인정하는 사람들은 내가 그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내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왜 다른 형태의 운 – 이를테면 특정한 재능 – 은 왜 다른가? 만약에 내가 주 로또에서 백만달러를 당첨되었다고 해보자. 나는 아마 내 행운에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대못할 수익을 내가 벌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일 것이다. 혹은 나의 승리가 나의 공훈과 관련이 있다고도 말 못 할 것이다. 비슷하게도, 만일 내가 같은 티켓을 사서 져도, 나는 실망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이런 불행을 당해 마땅하다고 불평하진 않을 것이다.

둘째로, 내가 어떤 재능을 칭찬하는 사회에 살아서 나에게 일어난 일이 역시 내가 공훈을 주장할 수 없는 것에 의한 것일지라도 역시 행운에 의한 것이다. 미국 프로농구 슈퍼스타는 1천만 달러를 농구를 통해 번다. 농구는 정말 인기있는 게임이다. 그런데 그 농구선수는 바로 아주 이례적인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축복의 사나이다. 그는 이 사회에 사는 게 행운인데 그 축복을 알아주고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오늘날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피렌체(플로렌스)시에서도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준다면(그가 잘하는 것의 가치를 알아준다면)-물론 그 당시에는 농구가 아니라 프레스코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알아주었다- 수요는 거기에 있었다. 아마 프로레슬링의 월드챔피언이 NBA스타가 아니라 팔씨름 월드챔피언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그의 잘못은 아니다. 소수의 서포터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돈을 내고 그 경기를 보려하지 않는다. 그가 테이블에 상대선수의 팔을 꺾어내리는 것을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신념에는 많은 호소가 있었다. 공훈은 아이디어로 구성되며 성공은 우리 것이라고. 하지만 최소한 그것은 좋은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의 경제는 공정경쟁이다. 특권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corr임을 진다. 우리가 이기거나 지거나 결국 우리의 노력*(sincere,earnest,effert,erect,endeaver,exertion,fortitude와는 다르나, 여기서는 이렇게 쓴다) 때문이다. 공적의 동의어는 (exploit, fear, merit, equal, earn, credit, deserve이다))에 기반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진 인간 에이전시” 라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우리 운명의 저자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우리 운명의 주인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는 역시나도 도덕적으로 만족스럽고, 이는 역시나도 경제 역시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정의에 관한 언급들에 암시된 것들이기도 한데, “그들에게 그들의 정당성을 주어라” 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재능이 우리 만의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리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그림일 경우를 인식한다면, 아무래도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선입견과 특권을 뛰어남는다는 믿음은 정의로운 사회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부여받은 재능이 빚이라면 – 유전적인 복권이던, 신으로부터 내린 것이던 – 우리가 그 부산물을 모두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이다.



[문제 1-1]

능력주의 보상을 원하는 가에서는 ‘아래’ 를 긍정적 평가

사회적 운을 말하는 나에서는 ‘아래’ 를 부정적 평가


[문제 1-2의 경우]

[접근]

그러나 우리의 재능이 우리 만의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리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그림일 경우를 인식한다면, 아무래도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선입견과 특권을 뛰어남는다는 믿음은 정의로운 사회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부여받은 재능이 빚이라면 – 유전적인 복권이던, 신으로부터 내린 것이던 – 우리가 그 부산물을 모두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이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고, 당연히 다의 주장은 반대일 것이다. “철저히 지원자의 재능과 노력을 반영하는 학생 선발절차” 를 주장하고, 무언가 사회에 빚을 지었다고 생각하여 마련하는 입시 제도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반은 비교의 기본이다.

라의 실험은 [문제 2-2 풀이] 에서 보듯 결국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의 주장에서는 실험 결과가 너무나도 타당할 것이며, 나의 주장에서는 실험 결과가 의미없을 것이다.


[문제 2-1 풀이]

보상이 직원의 자발적인 동기에 오히려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의 주장. [중괄식. 어려운 지문]두 번째 그림을 보면 보상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내재적 동기가 높은 사람들이 훨씬 더 동기를 떨어트리고 있음. 즉 보상과 내재적 동기는 반비례함.

또한 첫 번째 그림을 보면 보상을 주게 되면 낮은 집단은 보상을 바라고 성과가 올라가지만 높은 집단은 떨어짐. 그러나 두 번째 그림에서 떨어지는 내재적 동기의 기울기가 높은 집단에서 훨씬 더 떨어지고, 낮은 집단 역시 성과는 올라갈지언정 내재적 동기는 가파르게 떨어지기 때문에 보상과 성과 사이의 동기 낮은 집단에서의 예외가 있다고 할지라도 반비례관계로 보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가의 주장을 평가하자면 전적으로 옳다.



[문제 2-2 풀이]

C의 함수로 표현한다 : f(c)

이를 표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우선 x값을 올려보자. 이 방향은 제안자의 만족감을 최대화하는 방향이 아니다.


X

의 값

x-c*(MAX(0,x)

의 값


제안자의

만족감(y1)

응답자의

만족감



0.5

0


0.5

0.5


0.6

0.6


0.4










반대의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X

의 값

x-c*(MAX(0,x)

의 값 = f(c)


제안자의

만족감(y1)

응답자의

만족감



0.5

0


0.5

0.5


0.6

0.6+0.1*c


0.6

0.6+0.1*c


0.7

0.7+0.2*c


0.7

0.7+0.2*c


0.8

0.8+0.3*c


0.8

0.8+0.3*c


0.9

0.9+0.4*c


0.9

0.9+0.4*c


Negociation Cancle




따라서 x의 값이 가장 작아지고, f(c)의 값이 가장 커질 때 제안자의 만족감은 가장 커지게 된다.

X = lim0이고, 이 때의 f(c) = lim10+lim0c 이다. 제안자가 응답자의 함수를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조건인데, 이 함수를 보면 응답자의 c가 아주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사실은 제시문 라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함수라도 선택하게 될 경우 응답자는 아주 적은 돈이나마 가져갈 수 있지만 이 함수를 거부하게 될 경우 응답자는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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