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133120] · MS 2018 · 쪽지

2015-02-07 15: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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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 개 같은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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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비가 오고 아내는 지금 샤워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젖어드는 칠월 장마철
비애의 강이 안팎으로 흘러가는데도
나는 내가 젖지 않는 이유를 모른다

빗줄기와 샤워 물줄기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물 한 방울 묻지 않는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 하지만
아내는 죽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젯밤 아내는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
화장실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어놓고 목매는 시늉을 했더랬다

그러니까 아내는 자살 미수 후 긴 잠에서 깨어나
비 오는 아침에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인데 아내는 
내가 늦바람이 나서 뻔뻔하게도 어떤 낯선 분냄새를 
버젓이 묻혀왔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내여, 죽음은 리허설이 없다
딸년도 아들놈도 조금은 슬프게 웃지 않았던가
혼절한 듯 쓰러진 엄마를 일으키던 아이들이
우리가 벌이는 애정행각에 시큰둥하지 않았던가
녀석들은 아마도 유행가로 배웠을 테지만
사랑이야말로 쓰라린 배반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비와 샤워는 의심의 음악인 셈이지만
나는 그 의심에 젖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한번 삿갓을 눌러쓰면 하늘이 보이지 않듯
아무리 비가 와도 나는 젖지 않는다

그래도 어젯밤은 너무 아슬아슬해
하마터면 모든 걸 실토할 뻔했다
아내의 신파적 자살 시늉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비애의 강에 풍덩 빠져버렸을 때
나 역시 자살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이 두려웠다

아내여, 내가 젖는다고 세상이 바뀔까
사랑도 죽음만큼이나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미수 사건 후 집에서 키우는 요크셔테리어 두 마리가
아내의 품속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내가 불러도 녀석들은 오지 않는다

개들이 진실의 냄새에 더 민감한 것이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코와 입에서
연기를 내뿜던 나를 녀석들은 차갑게 외면했다
그건 개들의 신념이다 본능이다

사랑의 기압골이 맞부딪쳐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아내는 지금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다
아내여, 지금 맞고 있는 물줄기가 사랑임을 왜 모르는가
물 위에 쓰는 것이 사랑인 것을
내가 젖지 않는 이유는 내가 이미 젖어 있기 때문임을

개들의 신념보다 나의 신념이 때로는 진보일 수 있는 게다
그러므로 나는 늬우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실토하지 않을 참이다
아이들도 못난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오겠지
사랑도 죽음과 같아서 리허설이 없다는 것을

빗줄기가 아무리 거세게 나를 의심한다 해도
나는 참말 고백할 게 없다
아내여, 물기가 마르거든 말을 붙여다오
고백하지 않는 당신의 신념이 뭐냐고
물 위에 쓰는 사랑이 대체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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