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류 [431424] · MS 2017 · 쪽지

2013-12-13 17:08:25
조회수 8,807

입시판을 나오면서.

게시글 주소: https://image.orbi.kr/0004071473

입시판을 나오면서 나에게 쓰는 글.


일기장에 남기고 싶은 지금 제 생각과 느낌을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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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침대 위를 뒤척이다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킵니다.

고요한 집안.

'똑.딱.똑.딱.'

시계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또각거리는 거실로 나와 거북이에게 밥을 줍니다.

조용한 집안에 홀로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생각을 죽이기 위해 티비를 켜보지만 뭐 달리 볼 것은 없습니다.

티비를 끄고 침대에 누워 조용히 숨을 죽이고 되지도 않는 사색을 해봅니다.

요즘 저의 하루는 항상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수능이 끝나면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결심했던 저이지만서도 열심히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것이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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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처럼 카톡을 킵니다.

친구들은 이미 학교에 갔네요.

어제 대학에 붙었다고 좋아라하던 재수생 친구는 아직까지 자고 있나봅니다.

단톡방에 찍혀있는 새벽 4시의 그의 코멘트가 그러합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뭐 달리 할짓은 없고 옷을 추여입고 산책을 나갑니다.

저는 초등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인데 쉬는시간 즈음 해서는 초등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주변의 모든 것을 기분좋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아침 10시경의 초등학교 주변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분들과 어르신들을 많이 마주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길로 몇바퀴 더 걷고 다시 집으로 옵니다.

뜨끈한 된장국에 밥말아먹고 어찌어찌하다보면 벌써 2시가 다 되갑니다.

여전히 집은 조용하고 오늘따라 저는 어쩐지 야릇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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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잊혀져가지만 가끔 저의 재수생활이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재수할 때 쓰던 일기를 꺼내봅니다.

뒷장에는 '수능 끝나고 할 일 : ... 수기 쓰기 ...'

오랜만에 오르비에 들어와 지금까지 제가 쓴 글을 읽어봅니다.

재수 초기에 쓴 글이며, 여름에 너무 힘들어 신세한탄한 글이며, 9평을 망치고 쓴 글이며, 수능을 11일 남기고 쓴 글이며 모두 벌써 과거의 글로 추억됩니다.

저 글의 연속으로서 형식적으로라도 제 입시생활을 끝내는 마침표를 찍고 싶어집니다.

조금 딱딱하고 진부해도 좋으니 저의 과거와 현재를 글로 남기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시멘트같은 대학생활에 지쳐 있을 때 가끔씩 저 자신에게 읽어주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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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는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던 느낌들이 지금은 벌써 흐릿해져 기억의 단편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단지 그 때 썼던 일기장을 보며 그 당시 느낌을 추측해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 수기를 쓴다는 것은 일기라기보다는 회고록에 가까운 것일 겁니다.

이 글은 일기도, 회고록도 아니지만서도..

저도 쓰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는 없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생생한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 글을 쓸 때의 감정인데 어쩐지 저는 이 글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련해져 저에게 위로 한마디를 건네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었나..?'라는 생각에 까지 도달하게 되면 수험생이였던 저와 지금의 저 사이에 무언가 낮선 괴리감이 생기곤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뭐..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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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도 오르비 한켠에서 열심히 광고 중인 대학에 수시 합격한 상태입니다.

링크건 글에서는 혹시 논술로 대학을 붙을지도 모른다고 썼는데 정말 이렇게 떡하니 붙을줄은 몰랐네요.

저보다 공부를 잘하시는, 그리고 잘하시던 대다수의 누군가에게는 조금 아쉬운 대학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저는 제가 만든 이 결과에 대해 정말 만족하고 있습니다.

작년 수능성적과도 비교해봤을 때 객관적으로도 성공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자부하는 저이기에 비록 목표는 Y대 문인과였지만 더 이상 대학에 욕심을 두지 않고 여기서 입시판을 떠나려고 합니다.

제 주위를 둘러보면 '재수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치 폭격을 맞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아군들은 모두 죽고 저 혼자 폭풍전야의 중앙대로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적들이 몰려오면 저는 다시 싸워야겠죠.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보고, 그때서야 비로소 제가 걸어온 1년이 얼마나 힘든 길이였는지, 그 무한경쟁의 장에서 저 멀리 낙오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느끼곤 합니다.

입시판은 무한경쟁의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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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면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가슴깊이 다짐했습니다.

지금도 그 다짐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게임을 끊고, 티비를 줄이고, 스마트폰도 멀리하고 최대한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아가자.'

대신에 고전을 읽으며 사색하며, 기타를 배우고, 여행을 다니고, 심신도 단련하고, 카톡으로하는 수다보다는 벤치에 앉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밤과 제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그런 삶을 약속했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역시 습관은 의지보다 힘이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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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서울로 올라가면서 가벼운 소설책을 몇권 싸들고 갔습니다.

그 중 라는 책이 가장 기억나는데 지금은 친구에게 줘버리고 제 손에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명문, 교토대학에 입학해 방탕한 2년을 보낸 후 3학년이 되어 과거를 뼈져리게 후회하지만 결국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아싸 대학생이 자신의 다다미 무한 자취방에 갖혀 80일간을 그 안에서 배회하다 무언가를 깨닫고 나와 고양이 라면을 먹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명문대학생, 독자는 재수생이라는 비대칭적인 상하관계를 무시한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 고시원이 주인공의 다다미방이 아닌가..'

'나도 수능이 끝나고, 논술이 끝나면 주인공처럼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무더운 여름날, 고시원 침대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노래를 안 듣기로 결심했지만 결국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하는대로'를 듣고 눈시울 적셨던 부끄러운 가을밤도 생각나네요.

지금도 그 당시 저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듣곤하지만 그 때 그 느낌은 여간해서 잘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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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재수를 하면서 용기를 얻었다, 인내심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잃은 것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1년 전의 저와 비교해봤을 때 아주 많은 것들을 얻게 되었지만 잃은 것은 1년이라는 그 시간 자체일겁니다.

제가 잠수탔던 1년 동안 하루종일 게임만 한 친구가 있었는가하면, 성실하게 공부했던 친구도 있었고, 누군가는 여친을 사귀었고, 누군가는 헤어지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아싸생활을 했고, 또 하고있으며, 누군가는 군대를 갔고, 틈만나면 여행을 다녔던 친구도 있습니다.

제가 만약 작년에 대학을 갔었더라면 저는 지금 어땠을지 궁금해집니다.

그 1년 동안 더 보람찬 경험을 했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1년.

그 1년 안에 있을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힘들었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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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유니세프같은 곳에 들어가서 구호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재수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또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돈이 허락한다면 전세계를 여행하며 책을 한권 내보고도 싶지만 단지 마음 속 망상에만 그칩니다.

저도 결국은 이 사회의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정해진 절차에 맞추어 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고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사람이 이정도로 변할 수 있다면, 대학 4년과 군대 2년, 6년 동안 제가 어떻게 변할지는 또 모르는 것입니다.

우연히 읽은 책 한권,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이 저를 변화시킬 수 있겠죠.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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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면서 갑자기 왜 제가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너무 길게 써서 벌써 5시가 넘어가기 시작했거든요.

더 이상 쓰고 싶은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르겠어요.. 뭘 더 써야할지?

진부한 말이지만.

수시 추합을 기다리시는 분들.

원서 영역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들.

이제 고3이 되어 제 동생과 경쟁하시는 분들.

처음 실패를 맛보고 재수를 시작하시는 분들.

삼수, 사수, 또는 그 이상을 계획하시는 분들.

늦깍이 수험생 분들.

지금 성적이 어떠신지, 목표 대학이 어디신지, 강남에 살든 시골에 살든, 부자든 빈자든 간에 상관없이.

기타 모든 조건에 상관없이.

달려오신 분들은 정말 수고하셨고, 달리실 분들은 힘내시길 바랍니다.

남은 추합 꼭 되시길 바라고, 원서 영역에서도 끝까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다들 추합이니 정시 라인이니 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다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고, 어울리지도 않지만 그래도 모두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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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될듯되는 · 465596 · 13/12/13 17:11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AnyThing · 357586 · 13/12/13 17:13 · MS 2010

    수고 많으셨습니다. 재수했는데 저도 입시판 나오면서 많은 생각 들더라고요.
    오르비 분들은 꼭 남은 추합 되시고, 정시에서 잘될것이라 빕니다.

  • 연단 · 290886 · 13/12/13 17:29 · MS 2009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대학고고고고고고 · 433865 · 13/12/13 18:53 · MS 2012

    글 정말 잘쓰시네요..따뜻한 문체에 술술 잘 읽었습니다. 님도 수고 하셨어요

  • 14skku · 418338 · 13/12/13 19:57 · MS 2012

    글 진짜 잘쓰시네요.. 수고하셨습니다!

  • FIFA · 457916 · 13/12/13 21:57 · MS 2013

    명필가 대단하세요

  • 결과에 따른 대가 · 459021 · 13/12/14 01:44 · MS 2013

    비록 다른 과거의 모습이지만 닮아있는 부분에 많이 공감했어요. 글 참 잘쓰네요. 저는 달려갈 늦깍이 입니다. 힘내서 달리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천성류 · 431424 · 13/12/14 01:59 · MS 2017

    윗글에 링크 건 글에서도 댓글 다신 분 아니신가요? 교대가 목표라고 하셨던.. 알고 댓글 다신건지 우연히 다신건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달리시길 바랍니다. 제 동생도 교대를 목표로 공부하던데 대한민국 예비교사님들 우리 교육계 정말 파이팅입니다.

  • ESPAVICTORY · 407104 · 13/12/14 01:58 · MS 2012

    한편의 수필같네요 빠져들면서 읽었어요. 저는 삼수를 했는데 제가 보낸 시간들도 이 글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어요.. 수시 붙으신거 축하드리고 입학전까지 남은 시간들 소중하게 잘 채워나가시길!! 전 열심히 정시원서를 쓰겠습니다....^^;

  • 천성류 · 431424 · 13/12/14 02:06 · MS 2017

    재수도 이렇게 힘든데 삼수생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3년동안의 고군분투.. 정말 마지막 남은 원서영역 끝까지 파이팅입니다.

  • kai-aakmann · 345437 · 13/12/14 02:32

    링크된 글도 읽었고 이글도 방금 읽기를 마쳤지만
    정말 대단한 필력입니다
    거창하다는게 아니라
    소박하지만 정말 진솔해요
    말로 표현이 잘안되네요 ㅠ

    오르비에서 이렇게 마음에 움직인 글을 읽어본기억이 까마득합니다
    입시판 먼저 떠나시는거 정말 축하드리구요
    저도 곧 따라 나가게 될것 같습니다

    덧. 글쓰시는거 정말 타고나신 거같아요
    어떤 분야든 형식이든
    계속 글쓰셨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오르비 밖에서라도 님글 다시 마주칠수있었으면 좋겠네요

  • 임독양맥 · 434190 · 13/12/14 02:46 · MS 2012

    새벽 두시에 읽는데 같이 대화하는 기분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 라면땅 · 413306 · 13/12/14 15:31 · MS 2012

    원래 오르비에서 수기 비슷한 글 올라오면 읽다가 마는데 님 글은 뭔가 하나하나 와닿아서 끝까지 다 읽었네요 필력이 부럽네요!

  • For Future · 448263 · 13/12/14 17:42 · MS 2013

    기분이 센치해지네요 글솜씨좋으세요ㅎㅎ

  • 고대경영원츄 · 479362 · 13/12/14 19:36 · MS 2013

    뭔가 의식의 흐름기법 같은 글인데 공감이 되서 링크된 글까지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머릿 속에 생각을 이렇게 글로 잘 표현하시니 대단하세요... 기분이 적적해지네요

  • migu55 · 472538 · 13/12/14 20:09 · MS 2013

    저는 학부모입니다.
    감성이 남다르신 분이네요.
    특히 공감되어 한참을 씁쓸하게 웃은 구절
    '미친듯이 공부만 해대는지...'
    이부분입니다.
    맞아요, 저는 위로 딸아이가 경영학과 3학년이고,
    지금 재수생 아들이 원서영역을 앞두고 있습니다.
    두아이 수험생활 지켜보면서 참 아이들에게 기성세대가 이들에게 요구하는 통과의례(대학입시, 취업 등등)가 너무도 가혹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애들이 미친듯이 공부만 해대기를 닥달하지요.
    제가 다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왜 이렇게 공부만 해대는지, 저 공부가 실제로 쓸모가 있는 것인지,
    그것이 한개인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아, 한탄합니다.
    미친듯이 온나라 젊은이들이 공부만 해대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요.

  • 나라고잘좀봐 · 479884 · 13/12/15 20:26 · MS 2013

    공감되는 글이네요. 저도 수능 끝나고 새로운 경험들도 해보고 유익하게 보내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냥 뒹굴거리고만있어요ㅜㅠ정시 원서써야하는데 마음만 착잡하네요

  • 1038537 · 1172091 · 23/09/06 01:05 · MS 2022

    9평 하루전 잠안오다 발견한 화석글이 심금을 울리는고만